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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타 도모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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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핫타 도모이에(1156년 ~ 1218년)는 가마쿠라 시대 초기의 무장이다. 호겐의 난에서 미나모토노 요시토모를 따라 참전하였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거병에 참여하여 시모츠케국 지토 직을 받았다. 이후 가마쿠라 막부 성립에 기여했으며, 13인의 합의제의 일원으로서 미나모토노 요리이에를 보좌했다. 겐큐 4년에는 히타치국 슈고로 임명되어 세력을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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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타 도모이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핫타 토모이에
『전현고실』 에도 시대, 그림:기쿠치 요사이
씨명우츠노미야씨, 핫타씨, 오다씨
이름핫타 도모이에
이명아사이에, 도모이에, 존넨, 핫타 시로
존칭치쿠고 입도 존넨
생몰년불명
사망겐포 6년 3월 3일 (1218년 3월 30일)
관직
관위종5위하
주요 관직고시라카와인 무샤도코로
우마노카미
우에몬노조
자에몬위
치쿠젠노카미
막부가마쿠라 막부 십삼인의 합의제, 히타치 슈고
가계
가문후지와라씨
아버지핫타 무네쓰나
형제우쓰노미야 도모쓰나, 핫타 도모이에, 사무카와노아마
배우자알려지지 않음
자녀오다 도모시게
이지라 아리토모
모테기 도모모토
시시도 이에마사
쓰쿠바 다메우지
아사바 도모히사
다나카 도모우지
다카노 도키이에
주조 요시카쓰
메이겐 (쓰쿠바 주젠지 벳토)
장강 의경의 아내
오구리 시게나리의 아내
양자주조 이에나가 (주조 가네쓰나의 아들), 핫타 무네모토
기타
주군미나모토 요시토모
요리토모
요리이에
사네토모
후지와라노 요리쓰네(호조 요시토키)
관련 사항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서자라는 설이 있음

2. 생애

1156년 호겐의 난에서 미나모토노 요시토모 편에 서서 싸웠다. 1180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거병하자 참가하여 시모쓰케국 모기국 지토직을 받았다. 1183년 노기미야 전투에 참가했고, 1184년 미나모토노 노리요리가 이끄는 헤이시 추토군에 종군했다. 1185년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무단 임관으로 요리토모의 분노를 샀을 때, 핫타 도모이에도 우위문위에 임명되어 요리토모에게 오야마 도모마사와 함께 비난받았다.[1] 1189년 오슈 전투에서 지바 츠네타네와 함께 도카이도 대장군을 맡아 오슈 후지와라씨를 몰아붙였다.[1]

1193년 소가 형제의 복수를 계기로 사촌 히타치 다이죠씨의 타케 요시모토를 호죠 토키마사와 함정에 빠뜨려 영지를 몰수, 시모쓰케에서 히타치로 본거지를 옮겨 슈고에 임명되었다.[1] 1196년 타이라노 가게키요를 저택에서 보호했다.[1]

1199년 요리토모 사후 2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의 전제를 억제하기 위한 십삼인의 합의제 일원이 되었다. 1203년 요리토모의 동생이자 요리이에의 삼촌 아노 젠죠가 호조 씨와 반(反) 요리이에 파를 형성하자, 요리이에 편을 들어 젠죠를 주살했다.[1]

1218년 사망했다.[1]

2. 1. 출신 및 초기 생애

호겐 원년 (1156년) 호겐의 난에서 미나모토노 요시토모 측에 서서 싸워 공을 세웠다. 지쇼 4년 (1180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거병하자 일찍부터 참가했으며, 같은 해 시모츠케국 모기국 지토직을 안도받았다.

우쓰노미야 씨의 당주 우쓰노미야 무네쓰나 (핫타 무네쓰나)의 아들로, 자매로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유모 중 한 명인 사무카와 아마가 있다. 『호겐 이야기』에는 시모쓰케국의 핫타 시로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로도로서 호겐의 난에 참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후에 히타치국 니하리군 핫타 (현 이바라키현 지쿠세이시 핫타)를 본거지로 삼아 성씨로 사용하였다.

2. 2. 가마쿠라 막부 성립과 활약

호겐 원년 (1156년), 호겐의 난에서 미나모토노 요시토모 편에 서서 싸워 공을 세웠다. 1180년 8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거병하자 일찍부터 참여했으며, 같은 해 시모쓰케국 모기국 지토직을 받았다. 1183년, 노기미야 전투에 참전했다. 1184년 8월, 미나모토노 노리요리가 이끄는 헤이시 추토군에 종군했다. 1185년 4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무단으로 관직에 임명되어 요리토모의 분노를 샀을 때, 핫타 도모이에도 우위문위에 임명되어 요리토모로부터 "진서(鎭西)로 가는 도중에 교토에서 임관하는 것은, 마치 느린 말이 길을 잃는 것과 같다"라며 오야마 도모마사와 함께 비난받았다.[1] 1189년 7월 오슈 전투에서는 지바 쓰네타네와 함께 도카이도 대장군을 맡아, 후쿠시마 하마도리에서 오슈 후지와라 씨를 몰아붙였다.[1]

1193년, 소가 형제의 복수를 계기로 사촌인 히타치 다이죠씨의 다케 요시모토를 호조 도키마사와 함께 함정에 빠뜨려 영지를 몰수하고, 자신의 본거지를 시모쓰케에서 히타치로 옮겨 슈고에 임명되었다.[1]

1196년에는 항복했다가 붙잡힌 다이라노 가게키요를 저택에서 보호했다.[1]

1199년, 요리토모가 죽자 뒤를 이은 2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의 전제를 억제하기 위해 결성된 십삼인의 합의제의 일원이 되었다. 1203년에는 요리토모의 동생이자 요리이에의 삼촌인 아노 젠죠가 호조 씨와 함께 반(反) 요리이에 파를 형성하자, 선수 쳐서 호조 씨에 대항한 요리이에의 편을 들어 젠죠를 주살했다.[1]

1218년에 사망했다.[1]

지쇼·쥬에이의 난이 일어나자 요리토모를 따라 1180년에 시모쓰케 모기군(현 도치기현 모기정)의 지토에 임명되었다. 1183년, 노기노미야 전투에서 오야마 씨와 함께 시다 요시히로를 격파하고, 요시히로를 따르던 히타치의 무사 시모쓰마 히로모토의 몰수령을 받았다. 뒤이은 헤이시 추토에서는 장남 아사시게와 함께 미나모토노 노리요리 군에 있었으나, 서쪽으로 내려가기 전에 요리토모의 추천을 받지 않고 무단으로 우에몬노조에 임관했기 때문에, 오야마 도모마사와 함께 요리토모의 노여움을 샀다. 1185년 헤이시 멸망 후 가마쿠라로 돌아와 쇼초쥬인 낙성 공양에 참석했지만, 1186년에 다시 상경하여 조정 및 구조 가네자네와의 교섭을 담당했다. 같은 해, 낭당인 쇼지 타로가 다이치 야행번을 게을리 한 탓에 게비이시에게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핫타 도모이에가 실력으로 쇼지 타로를 탈환했기 때문에 조정으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1187년에 요리토모로부터 범인 인계와 벌로 가마쿠라의 가도 정비를 명받았다. 1189년의 오슈 전투에서는 지바 쓰네타네와 함께 도카이도 군의 대장군으로 임명되어, 아사시게 등 히타치국의 병사들과 함께 무쓰국으로 출진했다. 1190년 요리토모의 상경에 수행하여, 요리토모의 추천으로 핫타 도모이에를 대신해 아사시게가 사효에노조에 임관했다.

2. 3. 히타치 국 슈고 임명과 세력 확장

겐큐 4년(1193년), 핫타 도모이에는 사촌인 히타치 다이죠씨의 타케 요시모토를 호죠 토키마사와 함께 함정에 빠뜨려 영지를 몰수당하고, 자신의 본거지를 시모츠케에서 히타치로 옮겨 슈고에 임명되었다.

당시 타케 요시모토, 이사 타메무네, 오구리 시게나리 등 히타치 국의 고케닌(御家人)들이 가시마 신궁 조영을 담당하고 있었으나, 잦은 지연이 발생했다. 이에 핫타 도모이에가 대신 봉행하도록 명령받았다. 이미 분지 원년에 히타치 국 슈고로 임명된 핫타 도모이에는 이웃 세력인 타케 요시모토 등 다이죠씨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같은 해, 소가 형제의 원수 갚음으로 가마쿠라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핫타 도모이에는 타케 요시모토를 자신이 토벌하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동시에 요시모토에게는 요리토모에게 갈 것을 권유했다. 의심에 빠진 요시모토는 핫타 도모이에의 권유를 거절하고 군비를 정비했고, 핫타 도모이에는 이를 요시모토의 모반으로 막부에 고발했다. 요리토모는 양측을 소환하여 논쟁을 벌였으나, 요시모토가 자신의 영지에서 방비를 강화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기에 핫타 도모이에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또한 같은 해, 핫타 도모이에는 호조 도키마사에게 해를 끼치려 했다는 혐의로 요시모토의 동생 시모츠마 히로모토를 숙청했다. 이처럼 핫타 도모이에는 모략을 통해 경쟁자를 제거하고, 쓰쿠바군, 이바라키군, 니하리군 등 옛 다이죠씨 영지를 획득, 자신의 기존 영지와 합쳐 히타치 국 남서부 일대를 자신의 소령으로 삼았다.

2. 4. 13인의 합의제와 만년

1199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사망하자, 뒤를 이은 2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의 전제를 억제하기 위해 결성된 십삼인의 합의제 중 한 명이 되었다. 1203년에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동생이자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의 삼촌인 아노 젠죠가 호조씨와 함께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에 대항하는 파를 형성하자,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의 명으로 아노 젠죠를 주살했다.

1218년에 사망했다.

3. 인물 및 일화


  •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친아들이라는 전승이 있으나, 호겐의 난 참전 기록과 모순되어 신빙성이 낮다. 오다 하루히사가 겐지를 사칭하기 위해 만들어진 설이라는 주장도 있다.[1]
  • 가마쿠라 저택은 오쿠라 고쇼 남문 밖에 위치했으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부자의 어행 때 선택되기도 했다. 교토 문화에 정통하여 교토 사절단의 숙소로 자주 사용되었다.[1]
  • 독실한 불교 신자로, 오슈 전투에서 포로가 된 히즈메 토시히라가 법화경을 외는 모습에 감명받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보고하여 면죄시켰다.[1]
  • 1190년 요리토모 상경 시, 고케닌의 숙로인 치바 츠네타네를 후위로 추천하고 자신의 명마를 내주었다.[1]
  • 아들 료신이 진언종 극락사를 개산했으며, 이 절에는 지가가 기증한 동종이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토가쿠지에 현존한다.[1]
  • 미나모토노 사네토모의 상경을 간언하여 중지시킨 일화가 있다. "짐승의 왕인 사자는 울음소리만으로도 짐승들을 두렵게 합니다. 군주가 인심을 괴롭히려 하지 않아도 백성의 두려움은 큽니다."라는 비유를 들어 사네토모를 설득했다.[1]

4. 관련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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